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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다수에게 권력을 상세보기
도덕적 다수에게 권력을
고민지(19세)
내겐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 있다. 중학생 시절, 처음으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한 불신을 느꼈던 나의 열다섯 살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은 채 나의 기억 깊은 곳에 여전히 숨겨져 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인기를 위해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를 왕따로 몰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상관 않고 그 친구에게 계속 말을 걸어 주었다는 이유로 도리어 내가 잠시 집단에서 소외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 말걸어 주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내가 감쌌던 친구마저도 나의 시선을 피했다. 나중에 다시 좋은 관계를 되찾기는 했지만, 그 이후 나는 아무리 친한 사람일지라도 진실한 고민이나 솔직한 그대로의 감정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왕따가 되는 순간, 혹은 누군가 왕따가 되는 것을 목격한 순간은 모두에게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피해자와 가해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완벽한 왕따가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다수의 암묵적 동의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를 수 없다. 다만 뻔한 그 사실에 대해서 우리 모두 무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 알면서 침묵하는 우리, 자신마저 피해자가 되기 싫어 가해자를 부추기는 우리, 바로 이러한 99%의 방관자가 되어 버린 우리가 학교폭력을 만들고 있다. 방관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다수는 부정의한 것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는 학교라는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강자들의 폭력으로 가득 차고 있다.
사실 방관자에게 선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할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관자에게 침묵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가 재조명해야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비롯되는 불편함이다. 아무리 경쟁이 치열해진다고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우러나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거나 금지된 것이라 여기면서 애써 모른척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 나를 보듬어주고 사랑해준다는 사실을 알 때, 용기 내어 이타적인 본능을 밖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 현명한 인류가 될 수 있기까지 분명 그 지혜로움은 언제나 타인들과 함께했던 공간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공생하는 인류가 되기 위한 지혜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경쟁 중심의 입시제도, 이기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학교폭력이라는 문제에 절대적인 책임과 권력을 가진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도덕적 다수의 힘은 단순히 수치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다수, 그리고 그 방향이 기본적인 도덕에 늘 근거하고 있는 다수, 그리고 그 도덕적 기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늘 노력하는 다수. 이러한 다수에게 절대적 권력이 주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와 혁명은 가능하다.
이제 드디어 방관자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방관자에서 진정한 삶의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99% 사람들의 형체가 모두 드러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이다. 이제 이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99%의 방관자였던 우리가 100%의 도덕적 다수로 진화해야 하는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출처] [인디고잉 34호] 청소년 칼럼 : 도덕적 다수에게 권력을|작성자 인디고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