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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역사를 시작하는 씨앗을 뿌리며 상세보기

작성자: 사무국 조회: 290147

희망의 역사를 시작하는 씨앗을 뿌리며

 

김상원(22세)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겐 각각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늘 순탄하지 않고 때때로 고난을 만나거나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한 순간들의 질곡이 쌓여 서로 다른 무늬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한 사람의 얼굴이 되고 인생이 될 것이다.

90년대에 태어난 내가 철이 들 무렵 우리 사회의 구조는 이미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여서 통금제도나 대통령 간선제 같은 제도는 그야말로 책에서나 보던 역사적 사실들에 불과했다. 그러다 좀 더 나이가 들자, 유신이나 6월 항쟁, 5‧18 민주화항쟁 등이 실은 우리 부모님 세대가 바로 겪은 일임이 어렴풋이 실감이 났다.

“엄마, 엄마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 기억나? 1979년에 엄마는 몇 살이었어? 그땐 실제로 분위기가 어땠어?”

이후로 나는 책을 읽다가 줄곧 이런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책과 사진을 통해 충족되지 않았던 호기심이 직접 그 순간을 살았던 어른들의 말을 통해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곧 어른들에게서 생생한 그 순간의 증언들을 듣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든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싫어서였을까 정말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일까? 답은 없었고 가깝게 느껴졌던 이야기들은 다시 활자로 변해 하얀 노트 위 정갈한 글씨가 되어 버렸다.

대학생이 된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런 경험들을 갖고 있는 걸까? 최근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들마저도 이미 교과서에 인쇄해버린 사건들처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오늘은 역설적으로 인쇄된 점수와 스펙 몇 줄의 사건이었기 때문일까? 카페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바로 그날, 휴대전화를 통해 배가 가라앉는데 그 안에 아이들이 100명가량 남아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불현듯 아침에 전원 구조라고 했던 뉴스가 떠올랐고 기댈 곳 없는 분노가 폭발하듯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이조차 오보였고 이후 거의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는 깜짝 놀랐고 함께 뉴스를 읽었고 걱정하며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곧 눈물을 닦고 시험을 치러 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사건이 진행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20년쯤 후에, 다시 이 이야기를 나에게 물어올 다음 세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누군가는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이 비극적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바꾸었는지 물을 것이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결국 세월호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버릴 하나의 사고가 아니라 우리 세대가 해명하고 기억해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주어야만 하는 사건임을 깨달았다. 이는 다른 내가 마주한 사건들 모두에서 생생히 들리는 외침이었다. 밀양에서 할머니들이 끌려갈 때, 새로운 고리 핵발전소가 다시 가동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해직된 노동자들이 생명을 버릴 때 나는 무엇을 했나, 나는 무엇을 보았나?

시대를 가로지르는 사건들이 하나씩 있다. 누군가는 4‧3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다 전 국토에 자리한 비극에 눈을 떴고 누군가는 70년 전태일의 죽음에서 노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으며 누군가는 5월 광주의 빚을 안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극히 당연한 오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피 흘린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것을 잊고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고통의 기억을 단절시켜 사회의 본질적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한 세대는 이제 그 연장선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많고 해결지점은 묘연한 지금, 많은 이들은 정치, 언론, 사법, 교육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가장 밑바닥까지 파헤치는 사건의 진행을 지켜보며 좌절하고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을 잊지 않되 생명의 가치와 공존의 윤리가 상식이 되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은 우리 세대의 의무이지만 이전 세대에게서 교훈을 찾아야 하고 개인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개인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역설의 극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모든 절망을 뚫고 우리는 포기하지 말자. 새로운 세대의 탄생은 곧 이 사회에서 우리가 함께 사느냐 죽느냐의 절대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포기하지 말자.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만 하는,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가 처한 고통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이고, 아직 그 어떤 이해관계의 틀에 속박되지도 않은 채 내가 모르고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을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역사를 끝낼 수 있느냐는 오직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체제의 명령과 순응의 논리 속에서도 인간적 양심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물려준 연대의 기억과 조금씩 진일보한 순간들의 희망이 쌓여 결국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세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인디고잉> 43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인 우리가 처절한 생과 사의 순간을 맞은 이 시대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지만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특별히 용감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비겁하지도 않았던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이야기이며, 이것이 부디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우리 각각의 마음에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인문교양지 인디고잉 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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